영혼의 무게

< 영혼의 무게>

 

얼마 전 90세의 생신을 맞으신 장모님이 자녀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맑은 정신일 때 하는 말이란 단서를 붙이고 당신의 사후에 대한 장례절차를 완고히 말씀하셨다.

<첫째> 가족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장례를 알리지 말아라.

<둘째> 기일마다 먼 곳의 자녀들(미국, 프랑스에 사는 처제)이 모이기도 어려우니 공원묘지에 있는 장인과 당신을 화장해서 고향 주위의 산에 뿌리기만 해라. 그러면서 처남에게 장례비용으로 사용 할 통장을 미리 맡기시며, 한 평생 성경 읽고 교회 나가는 복을 누렸으므로 내 영혼은 천국에 있으니 더는 찾지 말라는 당부이셨다.

그 전부터 가끔씩 하셨던 말이지만 최근 기력이 쇠진하셔서 바깥출입이 어려운 때 하시는 말인지라 듣는 모두는 숙연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 온 인생의 결론이라 하지 않은가!

장모님은 참으로 건강한 삶을 사신분이고 영혼이 가벼운 복을 누린 분이시다.

내 삶의 무게는 어떤가!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이 어둡고 힘들게 살아 온 것인지, 가볍고 밟게 살아온 것인지, 단정 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의 여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람은 몸무게가 무겁든 가볍든, 젊든 아니든 生命이 다하는 순간 체중은 21g이 줄어든다고 한다. 임종을 일상으로 경험하는 의사들의 학문적 얘기이고 던컨 맥두걸이라는 과학자가 초정밀 저울을 통해 임종순간의 몸무게 변화를 측정한 결과라 하니 믿지 못하거나 신빙성을 부정 할 이유는 없다.

21g의 정체!

의학적으로는 탈수현상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生命을 지탱하는 정신의 무게가 아닐까!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혼의 무게가 아닐까!

결국 죽음이란 생명체에 영혼이 있고 없음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다면 틀리진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과연 21g의 가벼운 영혼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는지, 또 가벼운 영혼으로 살았다 해도 내 생이 유익했고, 보람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내 살아온 과정도 간단치는 않았으니 내 영혼의 무게 역시 무거울 것 같다.

법원에 근무할 때도, 법무사로 살면서도

머리를 항상 복잡하게 굴리면서 살아 왔으니 남보다 1g 더 무거웠을 것이고

마음에는 엉킨 그리움을 담고 살아 왔으니 평균적으로 1g 더 무거웠다.

실현하지 못한희망이라는 짐을 지금도 완전 벗지 못한 상태로 있으니 1g 더 무겁다고 보면 난 평균적으로 남들 보다 3g 정도 더 되는 영혼의 무게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얼마 남지 않은 이나마 더 늦기 전에 마음의 무게, 영혼의 무게를 가볍게 하며 사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우선, 제일 무겁다고 느끼는 것부터 찾아보자!

아무래도 욕망일 것 같다. 경제적 욕망인 물욕이야 내 능력이 부족함을 안 뒤 진작 포기했으니 그렇다고 치고, 허영심과 명예심은 아직도 남아있어 나를 무겁게 하는 것이라면 당장 이것부터 버리는 훈련을 해야겠다. 조금씩 하다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 마음의 무게를 가장 짓누르는 일은 친구들, 형제들과 손잡고 살아오지 못한 안타까운 세월이다.

어느 때인가 절친했던 친구가 사업이 어렵다며 찾아와 손 내밀 때 난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부도난 사업자금을 막아줄 만큼의 경제적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마음의 짐이 되어 45년의 친분이 멀어진 것만 같다. 그 이전에는 어려운 형제가 도움의 손 벌렸을 때 온전히 채워주지 못함으로 인해 오랫동안 격조하며 원망과 미움의 벽을 쌓은 것이 언제나 나를 무겁게 한다. 간절한 손 내밀었던 그 막냇동생은 결국 외로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미 몇 해 전에 쓸쓸한 영혼으로 떠났으니 아무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지만 가슴만 저밀뿐 달리 해결의 기미도 없다.

그 뿐인가, 지금 마음이 가장 무거운 문제는 둘째딸에 대한 회한이다. 왜 좀 더 일찍 그 자녀의 여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그냥 자기 하자는 대로 살게 했으면 좋았던 것일까!

그 아픔, 나의 십자가가 되어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마다 딸을 위해 기도하며, 참회하며, 더 이상의 원망을 품지 않도록 하여 내 영혼의 무게가 더는 무거워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기도가 전부는 아니지만 기도 밖에 할 수없는 나의 무력함을 안타까워하며 내 영혼의 무게도 21g 이면 좋겠다.

이렇듯 지금까지도 후회스런 일이 많았는데 다가오는 2019년 새해부터는 경노우대를 받는 나이마저 되었으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늙었음을 인정하고, 흐르는 세월의 강에서 부유물이 되지 않기 위해 적절한 긴장감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할 것이며

경박한 행동을 자제하고 매사 조용한 걸음걸이를 해야 할 것이며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침묵을 생활화 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면 피곤하니 시선은 독서로 만족하기로 하고 외롭고 슬픈 일 앞에서도 부질없는 낙심은 않기로 하자!

비루하지 않고 품격 있는 삶을 이어가려면 더 많이 베푸는 일을 해야 하므로 우선 건강해야만 한다. 아침마다 근력운동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도 혼자서는 안 된다. 장모님이 맑은 정신일 때 진정성 있는 말을 하시듯, 나 역시 운명공동체인 아내와 함께 건강하지 않다면 내 영혼 21g의 무게조차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맑은 정신일 때 반문해 본다.

2018. 12. 12.

<2007111.자 법률신문에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제목으로 발표한 글도 있습니다.>

 

by 마음 | 2018/12/12 16:43 | 隨想 | 트랙백 | 덧글(0)
목사님께 드리는 글

사라지는 것은 시간입니다.

아래의 글은 미국 죠지아주 Brunswick 한인교회에서 헌신적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과 10년 전에 필설로 나눈 신앙인의 자세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글에는 율법과 선행만으로 천국에 갈 수 없고 "니고데모"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천국백성이 될 수 있으니 천국소망을 바라고 살라는 목사님의 확고한 신앙관에 비해,

청지기 역할을 마다하고 평범한 신자로서만 생활하는 저의 부족한 신앙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기독신앙인의 자세와 고뇌가 노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와 같은 평범한 기독교인 일지라도 창조론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이웃사랑의 기독정신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를 알리고자 사라지는 시간을 추억하며 저의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Lee 목사님!

영혼구제를 위한 목회로 피곤하신 가운데서도 저의 가정, 저의 자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많은 사랑을 주시는 목사님께 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만남은 반갑기만 하고 그지없이 기쁜 마음! 그 이상 다른 의미도 이유도 없습니다. 저로서는, 목사님과의 관계가 목회자와 신자의 관계이기 보다 친밀한 형제애를 지니고 있다고 믿기에 편하고 격의 없는 대화도 좋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곰곰히 생각하니 목사님 말씀에 스며있는 의미가 저를 혼돈스럽고 무겁게 하여 편치 않은 밤을 보내고 이 글을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사심 없이 받아 주시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 주시기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먼저 저의 기독교 신앙관에 대한 목사님의 실망을 감지하지 않을 수가 없음에 유감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도 치열했든 저의 기독교 입문과정을 알지 못하는 목사님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실과 다르게 저의 인격체가 지적, 학문적으로 많이 무장되어 성경의 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보시는 관점, 성령의 체험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는 관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여도

저는 한 생명체의 가치가 영혼의 맑음에 있지 아니하고 입술로 성령을 인정하고 아니함에 있다는 양비론적인 기독교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영()이 없는 영혼은 있을 수 없을진데, 성령이 없다면 모든 게 악령으로 채워진 것으로 단정하여 그 인격체를 불쌍히 혹은 구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목자로서의 종교적 가치관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인격체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수십 년간 고뇌하면서도 저는 부족하여 헌신적 신앙인의 삶을 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고 그냥 양심적이고 맑은 내 영혼만을 갈구하며 소극적 신앙인으로 살아 왔는데,

이러한 내 존재를 비기독교인의 표본이기라도 하는 듯 가여운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시는 목사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쓸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아닌 다른 목자가 그러한 시선을 제게 보냈다면 전 그러한 목자의 신앙관에 저 역시 가소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제가 믿는 종교인 기독교의 가치나 성직인 목자에 대한 도발이나 도전을 하자는 취지가 아닙니다.

개인적 인격체로 신앙태도의 인정여부를 떠나 뜨거운 성령(聖靈)만을 추구하며 말세론적 현상과 물의 심판, 불의 심판만을 부르짖는 종교지도자라면 세상의 모든 기독인의 자세가 과연 어때야 한다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종교 지도자만이 세상의 구원을 장담 할 수 있다면 인간 정서(情緖)를 소중히 여기고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며 지성적이고 과학적인 思考의 사람 모두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란 말입니까!

사람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어 신앙의 방법을 달리 할지라도 종교에 귀의한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마다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물과 불을 선택하지 않으면 뜨거운 영이 없다하여 그 인격체의 신앙관을 송두리째 부정한다면 이 세상에 온전한 기독교인은 누구입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인격체가 존재하므로 신앙의 방법에도

적극적인 사람, 방관적인 사람, 조용한 묵상을 신앙인의 기본으로 여기고 성경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독교인이 분명 있음에, 아니 많음에 역시나 한 인격체인 목사님의 목회 성격과 불일치 한다하여 다른 신앙인의 존재를 가벼이 재단 한다면 그 또한 아집이며 격을 달리하여 우월한 지위의 성직관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의 근본 됨은 성경의 창조론을 인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생활가운데 이웃 사랑의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기본임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래서 이러한 자세로 가정을 다스렸고 자녀를 양육하였으며 매일 매일을 감사의 기도와 감사의 생활로 저의 신앙적 소양을 삼아 왔는데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고 뜨거움이 없다하여 저의 기독교적 신앙관이 의심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저의 태도는 참으로 반 그리스도적 일 수 밖에 없겠지요!

믿음의 연륜이 쌓이면 반드시 장로가 되어야 하고 교회 청지기가 되어야만 과연 신앙인으로서의 진정성을 인정받는 일입니까?

물론, 참 성도의 도리이기는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도 있을수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도 목자로서의 덕목이 아닌지요?

물론 목사님께서는 대화나 설교의 전부를 한사람에게라도 정말 좋은 신앙인으로 양육하려는 열정이 있으시니까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기대치에 못 미치니 안타까움에 그러시는 것일 테지만,

천편일률적일 수 없는 인격체마다의 개성을 인정치 아니하고 교리와 설교만을 목회의 방향으로 설정하여 성령의 은사, 방언의 은사만을 내세우신다면 권위에 함몰된 구약의 종교 지도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한 목회관은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기독교리의 회의를,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뿐인 절망감을 줄 수도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로 귀한 사역을 담당하시는 목회자들 중에 자신이 받은 영의 은사를 너무 확신한 나머지 예기치 않은 우를 범하는 목자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다른 사람의 염려에 조금도 귀 기우리지 않는 특질이 있음도 역시 보아 왔습니다.

목사님! 이러한 저의 항변이 제가 교만하여서가 아니라는 사실만 이해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형제같이 따뜻한 목사님을 늘 존경합니다.

목사님의 목회에 아름다운 가정이 많이 참여하여 따뜻한 신앙인들이 넘치고 저도 그 일원이 될 수 있기를 감히 기대해 봅니다.

 

2008. 5. 13. 새벽 김 영석 드림

 

To: soapboxlee@hotmail.com

Subject: 목사님께 드리는 글

Date: Tue, 13 May 2008 19:50:01 +0900

 

김 법무사님, 우선 제가 열정이 앞섰고 지혜가 부족했음을 사과드립니다.

시간이 촉박하고 존경하는 분들이라 이해하실 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두 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사는 기쁨을 소유하는 목적에 열심을 두다보니 김 법무사님의 신앙관을 더 이해하는데 소홀하였음을 말입니다. 김 법무사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또한 그런 삶을 사시고 계심도 인정합니다. 사실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과 본인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찬송가 405"나 같은 죄인 살리신" 노랫말의 저자 "뉴튼" 목사님도 자신이 천국에 가면 세 가지의 놀랄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1. 세상에 사는 동안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천국에서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것.

2. 세상에 사는 동안 저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천국에 가보니 있다는 사실.

3.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김 법무사님, 제가 드린 말씀 가운데 지나치고 배려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드린 말씀의 중심은

1. 아리송한 구원이 아닌 확실한 구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살면서도 정말로 기쁜 생활을 하시는 것

2. 모든 삶 속에서 행하시는 선행이 모두 구원을 기초로 한 상급으로 하늘 나라에 적립되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 부는 날 천국에서 큰 면류관 쓰고 하늘나라에서 만나기를 원해서 지윤이 부모님에 대한 저의 사랑과 열정이 너무 지나쳐 마땅히 지켜야 할 부분을 제가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가 두 분을 단지 한 교인으로 간주하였거나 전도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와 도리를 지켰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성경의 한 을 인용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21절의 니고데모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원이라는 것은 당시에 "산 헤드린" 종교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율법을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과 전통을 지키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성경을 해석하고 강론하며 심지어 "디아스포라 유대인"(당시 중동과 소아시아와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이 성경의 해석을 요구할 때 해석하여주며 율법을 어긴 유대인들을 재판을 담당하였던 최고의 종교 재판기관의 72인 멤버의 한 사람으로서 메시야(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당시의 이 사람의 배경은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기에 모든 조건을 구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으로나 지식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를 만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율법을 잘 지키니 하늘나라를 들어가거나 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선행을 잘하고 안식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지키니, 또 하나님 말씀을 잘 해석하여 가르치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단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거듭남의 의미를 깨달은 니고데모는 변화되어 750-53절에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였고 결국 1939절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하였습니다. 삶의 전체를 보거나 행함을 보건데 김 법무사님이 저보다 훨씬 귀하고 깨끗한 삶을 사신 것을 제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는 선인과 악인의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 양심에 어긋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선행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성경의 내용이었습니다.

구원의 내용과 방법은 우리가 이해하는 범위와 상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김 법무사님 내외를 사랑하는 저의 마음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저의 지혜가 부족하여 지윤 아빠, 혹은 지윤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드렸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드린 대화의 내용인 예수님의 사랑을 통한 구원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저는 성령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반드시 강조하지만 성령의 은사나 또한 그 은사 가운데 하나인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나 신유의 은사와 같이 외적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믿음의 은사, 지혜로운 말씀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 법무사님, 제가 두 분을 지나치게 믿고 어떠한 의식이나 격식을 버리고 말씀드린 저의 지혜 없음을 이해하시고 단지 드린 말씀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을 통한 기쁨으로 늘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주후 2008514일 부족한 종 * * * 드림

<사라지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시간입니다.>

 

by 마음 | 2018/11/09 15:08 | 삶의 향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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