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농촌도시


<할아버지와 제비>

나이가 들면 젊은 때 힘겹게 지나갔던 일조차도 아름답고 그리움으로 채워지는 것이라면 어쩌면 늙음은 서러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알고 창조를 꿈꾸는 사색인지 모르겠다.

한국의 50대 이상 남자라면 농촌에서 자랐거나, 자라지는 않았을지라도 들녘을 한번이라도 거닐면서 어린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출발한 한국의 역사는 농사와 관련된 산업이 1980년대까지 이어졌고 아니 지금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비라도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어린시절의 농촌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명색이 양반, 선비 따지는 집안에서 태어난 장손인지라 직접 모를 심거나 낫을 잡은 적은 없지만 모내기철 못줄 잡아준 기억이며 새참을 이고 가는 고모뒤를 술주전자 들고 따르든 기억은 너무 흐뭇한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경운기도 나오기 전의 60년대, 70년대 초의 농촌정경이다.

내가 실제 모내기를 해 본 것은 軍에서 대민지원을 나갔을 때가 처음이니 내 고향이 농촌이고 삼백의 도시 상주(尙州)라 하여도 나는 농사일을 전혀 모른다.

서울에 살면서도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께 가는 일이 가장 신나는 일이었음은, 하늘 아래 가장 큰 근본이(天下之大本) 농사로 알고 농경(農耕)의 혈통을 이은 토종의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학이 되기 전부터 고향에 갈 기대로 잠못 이루든 국민학교 시절,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성적표(통지표)를 받으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열심히 했던 어린 시절! 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손부채를 흔들어 주시며 장손인 나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만 보시든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제 내 나이 그 때의 할아버지 나이가 다 되었건만...

20년전의 비오는 날에도 지금과 같은 느낌이었다.

< 都市의 비 >

때 묻은 하늘

하얗게 단장하려

7월의 장대비가

氣勢좋게 내리건 만,

이 都市엔

흙탕물 점벙거릴 마당이 없다.

거친 소낙비

돌팍새 매 뿌리면

배잠방이 둥둥걷고

흙을파며 놀던 故鄕!

다듬이 방망이로

호령하던 할머니께

숯-불 다림질

끝 잡아 주던 時節 !

都市의 비는, 鄕愁만 젖게한 채

아스팔트 위에서

자지러 진다.

1992. 7 .17. <법률신문 발표>

정말, 배잠방이 둥둥걷고 흙을 파며 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고향이라는 영원의 안식처에는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앞산과 들에는 메꽃과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마을 어귀에는 어른 손바닥 보다 큰 수세미 잎의 그늘이 더위를 식혀주는 우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비라도 내리면 빗소리 보다 지붕 처마의 제비새끼 지저귀는 소리가 더 따갑게 들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 제비소리는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내게 다가오는데 오늘날엔 고향에 가도 제비 보기가 힘들다.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제비도 사라진 것인가!

할아버지는 골방(글방)에서 여름, 겨울 없이 긴 담뱃대와 화로를 끼고 사신 것 같다. 불이 귀했던 시절이기도 하고 장작만이 땔감이었든 시절이었으니 재를 담아 화로에 담아두고 늘 불씨를 관리하시기 위함 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글을 읽히시다가도 마당에 걸린 광목과 삼베옷들 사이로 제비가 낮게 날면 “빨래 걷어라!”고 호통 치시든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당시는 제비가 날면서 빨래에 닿으면 제비똥 묻을까봐 그러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올 조짐 이었기에 다 말린 빨래를 다시 비에 적실까봐 걱정하시는 숨은 뜻이 계셨든 것이다.


산골 마을은 멀리서 오는 먹구름을 보지 못하니 어른들은 비가 올 징조로
몸의 신경통이 도지거나 개미가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고도 곧 큰 비가 올 것을 예견하셨고 신통하게도 그 예측은 잘맞았다.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는 제비의 움직임으로 기후를 관측하셨는데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을 보면 가장 정확했다. 제비의 먹이인 벌레는, 모기, 하루살이, 파리, 잠자리 등인데 이러한 곤충은 습기가 많아지면 몸이 무거워 높이 날지 못하니 제비가 낮게 날면서 먹이인 식량을 거두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그토록 친밀하든 제비가 농사짓는 땅이 줄었음이지, 농약사용 때문인지, 요즘은 보기조차 힘든 멸종위기의 새가 되어버렸다 하니 내 가슴속의 향수조차 명멸의 위기가 오는 듯하다.

지금도 뒤안 감나무엔 감꽃이 피고 꽃을 피웠던 힘으로 가을이면 감은 열릴 것인데

장손인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달이 낀 올해에는 조상 묘를 이장하겠다는 삼촌과 당숙 어른의 으름장이 결국 현실로 나타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던 고향 선산에는 묘와 상석이 사라지고 포크레인으로 다져진 황토색의 터만 남았다.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지 않을게 걱정되어 종친이 관리하는 종중의 선산으로 이장을 했다는 삼촌의 명분이나, 골짜기 선산은 교통이 불편해서 산소관리가 힘들다는 당숙의 변명이 1년에 한번뿐인 벌초를 얼마나 수월하게 할지 모를 일이지만,
선대 묘소, 할아버지 묘소, 다 사라지고 나에게 제사권이 있는 선친의 묘소만 내 고집이 통했음을 증명하듯 덩거렁 외롭게 된 고향의 선산.

할아버지와 제비는 고향의 신표였는데 묘의 봉분도 사라졌고 제비 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마을이란 이름조차 무색하게 사람이 사라진 집터에는 새끼제비 지저귈 둥지조차 없으니 참으로 내 향수어린 고향에는 남은 것이 없다.
하긴 집터가 남았다 해도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 수 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외롭고 고단할 때면 연민으로 내 마음이 지향하는 곳!  나를 가장 평화롭게 해 주는 추억의 창고, 할아버지 산소가 있던 내 고향이었는데...... 

2012. 6. 19.


by 마음 | 2012/06/19 09:54 | 삶의 향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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