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와 개명

개명의 사유

퇴근무렵 다 되어서 무료상담이 가능 한지를 묻고 찾아 온 당돌한 상담인이 그리 곱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일 오시라고 되돌릴 수는 없어 자리를 권하고는 메모지 들고 나도 앉았다.

의외로 활달하고 밝은 표정의 상담인은 내 속내야 아랑곳 없이 사무실에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기 위해서란다.

자신의 이름은 옥희(玉姬)이고 올해 25세인데 현재 불리어지고 있는 옥희(玉姬)는 공부상의 이름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나 자신이 인정하는 이름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반드시 개명을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묻는다. 나는 이름 때문에 팔자타령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 왔다.

더러는 남녀가 평등한데 왜 아버지의 성씨만 사용하느냐며 어머니 성씨를 넣어 개명을 하겠다는 여성도 간혹 있는데 지금 찾아온 상담인은 그 정도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개명을 원하는 상담인들 공통점은 이름은 자기 인생의 신호등인데 내가 원하는 이름이 아니라서 인생이 망가진다고 믿으니 개명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가정이 평안하지 못한 이유가 이름 때문이라는 사람들은 인생이 불공평하고 자신은 그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법원은 ‘헌법상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이라는 이유가 정당하면 허가를 해 주는 편이다.

내 기억으로는

박계연( )이름을 가진 여 선생님이 학생들이 자기 없을 때 ‘박개년’으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충격 받아 신청한 이름은 거북하고 부르기 힘든 이름이라 하여 허가 해 주고,

한창 노숙자들이 서울역과 지하도에서 노숙을 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노숙자’란 여학생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동급생으로부터 ‘Homeless’로 놀림의 대상이 된다고 개명허가가 나기도 했다.

35세된 쌍둥이 자매의 이름이 ‘이아롱, 이다롱“이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허가해준 경우도 있으니 그렇다 치고

4월의 아카시아 꽃같이 싱그러운 나이에 그렇게 거북스런 이름도 아닌 것 같은 상담인에게 ‘옥희’라는 본인 이름을 굳이 개명의 필요성이 있겠느냐는 되물음에 발갛게 달아오른 표정의 상담인은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는 자세다.
자신의 이름에 대한 좌절은 이미 고등학교때 였는데 우연찮게 접한 성명학이란 제목의 책을 읽었는데,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이름이 그 사람의 성품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한 내용에 공감하였다. 고

좋은 이름, 큰 이름은 철학적 의미에서도 그 속에 건강운과 출세운이 있다는 운명론적 귀결을 얻었단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이 “옥희” 玉(구슬 옥) 姬(계집 희) 임에 좌절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姬(계집 희) 라는 말이 너무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화가 났단다.
자신의 장래 희망은 방송국 기자나 PD인데 자신의 야망과는 이름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더란다.

자신의 시시하기만 한 이름에 대한 불쾌감이 생기자

자기의 이름을 이렇게 경솔하게 지어서 출생신고 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까지 들었고. 오빠의 이름 원일(元一) 언니의 이름 채현(彩賢))에 비하여도 자신의 이름 옥희는 유흥가 기녀들에게나 쓰일 듯한 어감과 뜻을 가진 것 같아 부끄럽고 분한 마음마저 생겼단다.

그러나 막내인 자신을 누구보다 챙겨주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야속한 마음을 나타낼 수도 없고 한동안 속으로만 앓다 친구들과 속닥임 끝에 자신의 고민을 호소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이름을 ‘정현’으로 부르기로 했으니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모두 동의를 받았다.

이-메일 끝엔 항상 웃는 모습의 ‘정현 보냄’이 모든 문서의 종결이었단다.

상담을 하다보면 사건의 승산에 대한 예측이라는 걸 할 수 있는데 이번 경우는 개명 사건으로 신청하면 허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 느낌이 오지만

상담인이 요즘 젊은이 특유의

인터넷 정보를 통해 자신만의 법률적 지식으로 무장하였고, 더구나 절차만을 묻기위해 무료상담을 요구한 옥희라는 젊은 여성에게

신청에 필요한 본인의 기본증명서와 부모님의 가족관계증명서 등 필요서류를 구비하여 직접 신청하라는 조언을 끝으로 상담을 마쳤다.

어차피 상담인이 사건 의뢰인이 되는 경우라면 나중에라도 올 테지만, 온다고 약속하여도 오지 않을 사람은 그만 인지라 상담을 끝내고 미련없이 일어서는데, 옥희는 가방에서 수수료라며 이미 준비해 온 돈을 내민다.

당황한 것은 내 쪽 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법률상담에 임해야 하는 법무사로서의 공익적 소명이 있어 상담해 준 것이니 상담료는 필요 없고 법무사수수료도 아낄 겸 본인이 신청하시라고

그러나 옥희는 이미

대학 1학년 때 호적상의 이름이 자신에게 거부감이 생겨 사회생활을 소극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로 법원에 개명을 신청을 하여 법원의 결정 허가를 받은 신문기사를 읽고 자신의 이름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즉시 개명신청을 하려 하자 당시 만 18세인 자신은 신청권이 없고 부모님만이 법정대리인으로서 신청이 가능하다하여 시도조차 못했다며 이번에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 없으니 법무사인 내게 의뢰를 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과거에 부모님으로부터 무시당한 기억이 새록새록 서운하단다.

생활에 바쁜 아버지는 그깟 이름이 뭐 대수냐며 “신경 끊어라!” 라는 한마디로 묵살해 버렸고 어머니마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그 이름으로 그냥 살아도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옥희는 참으로 자신의 고충을 몰라주는 부모님이 야속하기만 하여서 결심한 것이 사회인이 되기 전에 내 스스로 이름을 바꾸겠다는 반감이 오늘까지 있었는데

옥희(玉姬)’양이 대학졸업 후 2년 동안의 각고 끝에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노량진 옥탑방 생활을 3년 넘게 하면서 참으로 힘든 시기를 자존심과 오기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끝내 이길 수 있었던 버팀목은 아이러니 하게도 부모님이 반대하는 개명신청에 대한 반항심 이었다며 웃는 모습이 스스럼 없고 청아하다.

그러다 공무원 교육원에서 보내 온 입소 안내와 신원조회 서류 자기진술서를 제출하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교육원 입소까지 여유가 생긴 옥희가 제일 먼저 시작할 것은 ‘개명신청’인지라 서류준비 되는대로 오겠다며 꾸벅 인사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자신감에 넘쳐 내일이라도 올 것 같았던 옥희(玉姬)’양이 한 달이 지나도록 오지를 않아 조금은 의아했는데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축 쳐진 어깨로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늦게 찾아온 사유를 얘기하는 분위기는 지난번에 만난 옥희가 아닌 듯 표정이 어둡고 날카롭기만 하다. 그동안 주민등록등본은 발급받은 적이 있지만 처음으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 본 어머니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오빠와 언니의 이름이 빠지고 자녀로 자신의 이름 외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함께 올려진 것을 발견하고 의아했단다.

처음엔 잘못 발급된 줄 알고 담당직원에게 확인까지 한 옥희는 자신의 가족구성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여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묻자,

옥희보다 더 놀란 표정의 어머니는 창백한 안색으로 거의 혼이 나간 듯 한동안 눈을 감고 신음 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기구한 과거를 설명하는데 옥희의 출생내막은 어머니의 ‘혼인외의 자’라는 사연이었다.

어머니는 전혼 중에 옥희를 출산하여 지금의 아버지는 친부가 아닌 것으로 자신과 어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이 날까지 살아오면서 어머니는 딸에게 출생의 비밀을 설명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지내 오다가

2008년 호주제 폐지로 남성중심의 호적등본이 없어지자 자신의 전혼 내력이 나타나지 않음에 고민거리가 저절로 해결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족관계증명서는 더 세세하게 자신의 직계 자녀만 등재되어 있고 옥희의 가족관계증명서의 부모난에는 전 남편과 자신이 친생부모임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으니 더 이상 과거를 감출수가 없게 된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딸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진정시킬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어머니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 그때서야 외갓집에 갈때마다 항상 혼자 갔던 기억이 나며, 자신은 모두로 부터 버림 받았다는, 배신감과 원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 낙망한 딸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옥희는 혼돈과 가눌 수 없는 감정으로 이미 며칠을 친구집으로 돌아다녔고, 스스로를 설득하여 모든 과거는 어머니의 일일 뿐,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은 하였으나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모든 현실이 견딜 수 없는 악몽인 듯하여 몇 번이나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느냐며... 울고 몸부림까지 처 봤지만 어머니는 묵묵부답! 그냥 흐느끼기만 하니 그 답답함을 금할 수 없어 법적으로 신분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할 방법을 묻고자 오늘 함께 온 것이란다. 

개명사건으로만 알고 있던 내게 신분관계 정리라는 더 큰 짐을 정리해 달라는 의뢰인을 만난 것이다.

법률상담이 인생상담으로 전환되면 내 태도는 더욱 신중해야 하고 말 한마디조차 가볍게 해서는 안됨을 알기에 적잖은 고민이 생겼다. 또한 법적인 신분관계 정리라는 것도 달리 없다. 그냥 사실을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일 뿐, 먼 훗날 발생 할 수도 있는 상속권 등의 문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옥희 어머니는 지우고만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고스란히 확인시키는 이 ‘가족관계증명서’가 웬수(?)같이 여겨지는 듯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옥희에게 말했다.

 " 네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고유한 네 이름을 네가 스스로 거부하고 다른 이름으로 개명을 하려다 자초한 일이다.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으로 조금 힘이야 들겠지만 옥희라는 이름 그대로 사용하고 어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를 그대로 제출하면 고통스러울 이유도 별로 없지 않느냐! 과거는 바꿀 수도, 변할 수도 없는데 집착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너는 지금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공무원시험을 통과하고 가장 좋은 사회인으로 새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다. 네가 고민하는 네 출생의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사항도 아니다.

혹시‘스티브 잡스(Steve Jobs)’처럼 네가 아주 유명인사가 되어 자서전 이라도 쓸 정도라면 그 때는 이미 혼인외의 출생자라는 비밀 따위는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라!"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 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는데 그런 운명은 반항 할 수도 없고, 반항한다 하여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순응하는 것이 고뇌하는 것보다 낫고 젊음의 때가 생각만큼 길지가 않으니 살다보면 다 잊혀진다.
그동안 너를 위해 감추려고 했던 엄마의 아픔이나, 친자식으로 받아들이고 공부 뒷바라지를 해준 지금의 아버지를 고맙게 여기고, 소중한 순간순간을 열정으로 사는 것이 네 존재감을 높이는 일이고 부모님에 대한 도리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넘었다.

곡진한 설득에 두 사람 모두 수긍하는 듯 몇 번이나 눈물을 훔치고 돌아 나갈때 나는 옥희에게 받았던 수임료 봉투를 쥐어주며 말했다. "너도 힘들었지만 엄마는 얼마나 아픈 마음이었겠니! 며칠 먹지도 못했을 테니 꼭 맛있는 음식 사드려라!" 처음엔 거절하든 옥희는"고맙습니다"를 연신 반복하며 공손히 인사를 한다.
이 때 나는 알았다! 옥희는 결코 버릇없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내가 설득의 말을 했기 때문에 감정이 해소된 것도 아니었다. 옥희의 심성이 원래 착했고 엄마를 너무 사랑했던 이쁘기만 한 딸이였음을...   
저만치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자 딸은 엄마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건너는데 두 사람의 어깨가 한결 높아 보인다.

그 다정함이 내 하루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었다!  

                         
2015. 1.

by 마음 | 2015/01/22 11:50 | 隨想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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