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비를 찾다.

큰딸은 엄마의 손 맛이 그리울 때면 아빠인 나를 부른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빌미로 미국에서도 부르고 일본에서도 부른다. 바늘이고 실이듯 내가 가면 엄마는 당연히 따라오는 가시버시임을 딸도 알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 핑계를 대고 갈 수 없다고 버티면 항공비 부담을 해서라도 엄마를 부르는데, 내가 가면 그 부담이 없음을 염두에 두었으리만큼 딸은 그렇게 영악하지도 계산적이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금번 교토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구년으로 교토대학에 잠시 머무는 사위곁의 딸이 나를 부르는데 일본의 관서지방에서는 그래도 교토가 볼만한 여행지여서 딸의 제의에 고민없이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름휴가를 대신 하기로 한 이유다.

교토는 막부시대 1870년 이전까지 천년의 역사에서 사실상의 수도였던 탓에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고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만 17개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교토에서는 5대 가업을 잇지 않고는 토박이라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우스갯소리가 틀리지도 않다

천년 넘게 보존된 성과 사찰, 대나무 숲 등의 일본 문화 진수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교토의 히가시야마 구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건너편 공원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리품임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군과 조선백성 12만 명을 죽이고 목 대신 코를 베어가 묻은 코무덤이란 우리민족 비감의 유산도 있다. 현대 일본의 후세 사가들이 자신들의 야만스러움을 희석시키려 코무덤 대신 귀무덤이라는 팻말을 세워놓아 더욱 아픈 역사의 장소이건만 과거사는 모르고 일본의 천년 고도(古都)에 먹을거리 여행만을 즐기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젊은 여행객들을 보며 안타까움이 솟는다. 역사는 과거이고 여행은 현실이니 어쩌나...

그런데 우리가 머무는 상경구 지하철 이마데가와 역인근에 수목이 울창한 경도어원(京都御苑)이 있어 새벽운동의 습관이 몸에 밴 내가 산책을 나가려는데 눈을 부시시 뜬 사위가 아버님 어원 옆에 동지사 대학(同志社 大學 일본이름 도시샤)이 있고 윤동주 시비(詩碑)가 있어요!” 하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도 나는 교토에 교토대학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위의 설명에 동지사 대학에 가면 윤동주 시비가 있다하니 나는 거침없이 어원 대신 윤동주 시비를 찾아 나섰다. 그 섬세한 감수성의 시인을 한 때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긴 윤동주 의 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애송시여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그 시인의 시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여행의 본전을 건진 것 같은 생각에 갑자기 흥분된 기운이 돈다.

동지사대학 중앙도서관 건물 옆면 울울한 나무 사이 5평 남짓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고 시비 아래엔 조그만 액자로 시인의 사진과 누군가 같다 놓은 한 송이 꽃,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시비에는 윤동주 시인 자필의 서시(序詩)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1941 , 11 , 20 , “. 시를 눈으로 확인하니 감격 그 자체였다.

과연,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서 선교사가 세운 몇 안되는 이 동지사 대학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의 서시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한다.

그의 시비 오른편에는 또 한 명의 이 대학 동문인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한국의 천재 시인들이 이 일본의 크리스챤 대학에서도 빛을 발하는 인물들로 오롯이 현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두 시비의 차이라면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그의 사후 50주년 1995218일 동지사 대학에서 기념 시비를 세웠고, 정지용 시비는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 정지용 기념 사업회에서 건립한 것이라는 기록이 돌에 새겨져 있다.

시비 앞에서 나는 벅찬 감동으로 기도를 했다. 암울한 시대에 28세의 나이로 절명하기까지 순결한 의지로 바람과 별을 노래한 고뇌의 시인과, ‘현대 한국시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어지는 불세출 시인의 흔적을 만나게 해준 인연이 감사하여서다.

 수필가 맹난자 님의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라는 책 제목 느낌 그대로이다.

윤동주 시 중 내가 좋아했던 시를 읊조리며 돌아서는데도 감동은 계속된다.

 

”<자화상>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내게도 문학을 꿈꾸던 한 때가 있었다. 도서관에 박혀 왼종일 책을 읽은 뒤 어두워진 사직공원을 돌아 창경궁 돌담을 끼고 집으로 걷노라면 가슴이 벙벙하여 발걸음이 무지개 걸음이었던 시절, 그 때가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며 숙소로 되돌아 가려 길을 걷다보니 아뿔사! 새벽에 나섰던 숙소의 방향이 아리송송하다. 정류장 몇 개를 걸어 왔는지도 모르겠고 어느 골목 어느 집인지 리두리 살피는데 당최 그 골목의 집들이 고만고만 하고 예전 우리나라에서도 봤던 적산가옥만 같아 여기가 그긴지 그기가 여긴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내가 원래 길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닌데... 난감하다. 어휴! 벌써 치매라도 온 것인가?

한 시간 가까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다리도 아득히 저려 오고, 은근히 부아도 치민다. 녀석들! 아직 늦잠 실컨 자고 있겠지만 이름있는 호텔에 숙소를 잡았더라면 이 고생 안해도 될텐데 하필 전통가옥 많은 골목에 숙소를 잡아 가뜩이나 허리멍텅한 내 눈썰미를 시험 하다니! 애꿎은 원망으로 입이 비죽거려지고 터벅거리는 발걸음이 툭툭 채인다.

그러다가 문득 알았다, 낯선 곳일수록 매사 신중해야 하고, 외국에서는 더욱 지혜로운 분별을 지녀야 하는데 내가 부주의 했음을, 그러니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머리가 밝지 못하면 헤맬수 밖에 없음이 당연하다. 방심을 하면 남은 인생도 이와 같으리라!

길을 잃었을 때 별을 헤아리는 마음의 시()를 읊조려도 결국 시가 집을 찾아주지는 못한다.

천년의 고도 교토에서 첨단의 이동통신마저 없었더라면 난 길거리 걸인 신세가 될뻔 했다.

 

2017. 9. 14.

 

 

by 마음 | 2017/09/14 15:50 | 삶의 향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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