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함께 살던 아파트

30년 전 대가족의 추억!

결혼 초 장모님은 딸로서 맏이인 아내가 교사생활을 계속하면서 신접살이를 하는데 대한 걱정이 많으셨다.

마침 나의 근무처가 마산법원이 되자 2층집 아래 위층에 살게 되면서 아침, 저녁 식사는 항상 장모님이 준비를 하셨고, 우리 아이가 태어나자 손녀가 아닌 장모님의 딸인 듯 안고 키우셨다. 맏사위인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제가 결혼했을 때도 한동안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아파트로 이사 하여서도 우리 식구 4, 처제식구 3, 장인 장모님 이렇게 9명은 항상 이웃하며 부대끼고 살았다. 아파트에서 어떻게 3세대 9식구가 살았는지에 대한 비결은 비결이라기보다 비밀이다.

마당 넓은 주택에서만 사셨던 장인 장모님은 애초에는 아파트 생활을 완강히 거부하셨지만 막내 처제까지 결혼 시키신 후, 큰 주택에 두 분만 남으시니, 당신들께서도 외로우시고, 아내가 맏딸로서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과 당위성을 적극 설명하니 반대의 명분도 없는지라 두 분은 못 이기는 척 수긍 하셨다.

마침 법원과 가까운 곳에 신축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공고를 보고, 아내는 장인, 장모님 한 채, 처제네 한 채, 우리 이렇게 3채를 동시에 얻으면서 오순도순 살기로 하였는데, 실상 아내의 속계산은 당시 우리의 작은딸과 처제의 큰딸이 모두 돌 전후의 유아인지라 아내와 처제가 아이들 맡길 요량으로 장모님을 꼬드긴 것이다.

그런데 막상 아파트 호수 배정을 받고 보니 장모님과 우리는 4, 처제는 3층이 되었다. 통로 하나에 양쪽 출입문이 있는 아파트 구조상 장모님과 우리 집은 바로 붙어 있으면서도 통로를 달리하는 호수였고, 처제는 장모님 바로 아래층이 되었는데, 아침 바쁜 출근 시간에 아내는 4층을 내려가서 다시 4층을 올라가야만 장모님 집에 애를 데려다 줄 수 있었고, 처제는 학교가 먼 관계로 새벽에 장모님 집에 애를 먼저 맡기고 출근을 하니, 장모님 집은 외손녀의 탁아소였다. 당시로서 먼 거리의 어린이 집에 맡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내와 처제는 행복했으므로 퇴근 후에는 정말 화기애애했다.

반찬도 한집에서 장만하면 두 집으로 배달되었고(주로 장모님 담당 이였지만), 아내와 처제 딸들은 웬만하면 장인. 장모님 댁에 가서 뒹굴었고, 동갑내기인 동서와 나는 주말이면 우리 집에서 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이러한 편함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보니, 우리 집에서 장모님 집을 갈 때마다 통로를 달리하여 4층을 오르내리는 일이 성가시기 시작하였다. 나보다 일찍 출근하는 아내는 아침마다 작은 딸을 안고 4층을 오르고 내리는 일이 힘들어 결국 딸을 데려다 주는 일은 내 몫이 되고 보니 그 역시 번거로워지기 시작하던 차에, 초등학교 때부터 연주자가 꿈이었던 큰 딸이 피아노와 플롯연습을 해야 하는데, 큰 딸의 방에 방음장치를 해 줄 형편은 안 되고 레슨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집에서 해야 했다.

그때마다 가까운 회사에서 일찍 퇴근한 나는 방해가 된다하여 아침에 올랐던 무학산 언저리를 밤에도 어슬렁거리며 두어 시간 보내다 오고는 했는데 불편은 나만이 아니었다. 어린 둘째 딸 역시, 으레 옆 통로의 장모님 집으로 피난 가듯 가 있다가 언니 연습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러다 장모님 집에서 잠들면 그냥 그대로 다음 날까지 자는 게 비일비재였다.

거기에다 매일 반찬을 주고받을 때 아내와 장모님이 베란다 난간에서 서로 그릇을 건너 주고 건너 받는데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장모님은 맛있는 찌개를 끓이면 건너 주기가 어려우니 아내와 나를 꼭 부르는데, 아내는 4층을 오르내리며 허우적거려야 했지만, 꾀가 생기고 그때만 해도 몸이 날렵한 나는 베란다와 베란다 사이의 난간을 이용하여 암벽 등반하듯 살짝 장모님 집으로 넘나들기를 했다.

남들에게 다소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통로 뛰어 다니는 것 보다 훨씬 낫고 아내도 처음 몇 번은 말리다가 내 운동신경을 충분히 믿었으므로 아슬아슬한 이런 장면을 그냥 모른 척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은 장모님에게 들키게 되었다.

장모님은 기겁을 하며김 서방 저러다 떨어지면 우짤꺼냐!”며 아내에게 경악의 화살을 돌리자 아내는등산 잘하는 남자니까 저 정도야 겁도 없지!”라며 너무도 태평스레 답을 하니, 정말 화가 나신 장모님은 찰싸닥 소리가 날만큼 아내의 등을 한번 때리며

야가 정신이 있나 없나! 실수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을 어찌 그리 남의 말 하듯 하노! 너거들 반찬이고 뭐고 다시는 안부를 끼다!”라며 역정을 내시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언성조차 높이지 않은 엄마로부터 날벼락이듯 등판을 얻어맞고 화달짝 놀라는 아내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키득키득 웃었지만, 순간 나를 째려보는 아내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지레, 다시는 베란다로 건너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반성을 하는 척하며 핑계 삼아

우리 베란다 벽과 벽 사이를 허물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무심코 던진 내 말이 장모님과 아내에게는 기발한 착상으로 들리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무모한 내 행동을 방지할 유일한 대책이라 생각 되었는지, “그래!”하며 긍정의 환호가 동시에 나왔고 당장 내일 시행하자는 모의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1987년 당시만 해도 아파트의 벽을 뚫고 문을 다는 공사는 엄두도 못 낼 심각한 문제인지라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허락을 해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아내가 낙심을 하기에 내가 슬쩍

허가는 당연히 안 해줄 테니 허가 없이 하려면 보이는 베란다가 아닌 방과 방 사이에 작은 문짝만큼의 크기로 공사를 해 놓으면 누가 알거냐!”며 은근한 편법을 제안 하였다.

그러자 귀 얇은 아내는 의외로 역시!’하며 엄지를 추켜세워 동의하였고, 이 천방지축 사위의 돈키호테 같은 발상에 장모님도 공모하면서 공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벽 뚫는 공사는 장인어른이 교회의 공사전문 집사님을 고용하여 아무도 없는 낮에 공사를 아주 천천히 하였으므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조차 모르는 완전 범죄로 우리 식구 모두는 아파트 벽의 원상을 변경한 공동의 범법자였다.

지금처럼 분양받을 때 입주자의 주문공사를 할 수 있었다면 벽 일부의 훼손과 보완쯤이야 구조물 변경도 아니므로 안전문제 위반이랄 것도 없지만, 당시는 이미 완성된 건축물에 함부로 손댄다는 것은 건축법 위반으로 그렇게 부담스런 일이었지만 필요가 크다보니 충분히 감수할만한 공사였다.

 

장모님의 작은 방과 우리 집의 작은 방 사이의 벽에 쪽문이 달린 공사가 끝나고 쳐다볼 일조차 없던 작은 방의 벽이 비밀 출입로가 되자 그 편리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 모두 통로를 달리하여 4층 오르내리는 일도 없어졌고 우리 집에서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다른 장모님의 작은 방이 나타나니 마치 여행이라도 온 듯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다.

아파트 출입문으로 다닐 때는 눈여겨보지 않던 장모님의 가재도구와 규모는 우리 집과 판이했는데 특히 장롱은 모두 자개로 장식된 것이라 쪽문만 열면 불빛에 번쩍였고, 안방에는 우리 집의 덩그렁 침대와 티크무늬목 책상 대신 화려한 보료가 깔려 있었으니 딸들은 쪽문 열고 할머니 집에만 가면 마냥 좋아서 뒹굴기부터 한다.

우리 집이 썰렁한 겨울이면 처갓집은 따뜻한 봄이었고, 우리 집이 무더운 여름이면 처갓집은 시원한 가을이었다. 때문에 나는 26평 아파트가 아니라 방이 5개인 50평 호화 아파트에 산다고 친구들에게 허세를 부리고는 했는데, 실제 장모님의 남는 방 하나는 큰딸 차지가 되었고, 장인어른은 틈틈이 과자와 용돈을 딸의 책상에 살짝살짝 얹어 놓고는 하여 자그마치 15년 동안 딸에게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한번은 작은 딸 혼자 있을 때 409호 장인집의 우편물을 받았던 아이가 통로를 달리한 408호 등기 우편물도 받아가는 것을 보고는 집배원이 혼동을 하여 어떻게 똑 같이 생긴 아이가 이집에도 저 집에도 있는지를 관리소에 물었다고 하여 우리는 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런 집안 분위기로 하여 딸들은 정서생활도 안정되었고 민감한 사춘기도 잘 넘기면서, 사랑으로 키워주신 장모님 덕에 딸들은 엄마보다 할머니를, 아빠보다 할아버지를 더 잘 찾는 외가 통속으로 사고와 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러다 몇 년 후 아래층 동서가 외국으로 나가게 되어 처제는 이사를 하였고 그 즐거웠던 대가족의 화평은 일부 깨어졌지만, 쪽문의 효용은 그대로여서 우리의 생활 구도는 소가족이 아닌 그래도 대가족이었다. 훈훈한 대가족제에서 얻어지는 가정경제의 절약도 적지 않았고, 맞벌이 가정의 취약점인 매일 매일의 식단준비에서의 해방감은 아내의 벙긋거림에서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나는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명분까지 얻어 해외에 있던 처남과 처제들에게 맏사위의 위세도 누리고 산 셈이다.

 

이렇듯 우리 가족만의 비밀 통로였던 쪽문에 대하여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사 갈 때까지 남에게는 얘기하지 않기로 하는 묵계가 성립되어 언제든 손님이 오면 문 닫고 커튼을 쳐서 완벽한 벽으로 위장이 되었지만, 장인어른만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 불문율을 깨고 큰딸, 손녀들과 함께 사는 기묘한 방법을 자랑하시느라 목사님과 친구 분들 오실 때마다 쪽문의 비밀을 그대로 노출 시키고는 하셨다.

불현듯, 문으로 들어오실 때마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음 짓던 장인어른의 모습이 생각난다. 작은딸의 손을 잡고 무학산 둘레 길을 거닐 때가 엊그제 같건만 …….

15년 동안 대가족이 평화롭게 살았던 쪽문의 추억을 모두 아름답게 기억하지만 아내만큼은 평생 처음으로 장모님에게 아프게 등짝을 맞았던 일로 인해 그 벼락은 철딱서니 없었던 내가 맞아야 했었다며 불멸의 원망을 지금도 하고 있다.

   2020. 5.

 

by 마음 | 2020/06/16 11:25 | 隨想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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